역사를 돌아보다 조인성 주연 '안시성 성주 양만춘 장군'

명절을 앞두고 세 편의 영화를 관람했어요. 협상, 명당, 안시성!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안시성을 이야기해 봅니다. 9월19일 같은 날 개봉을 하면서 가장 핫한 주목을 받았던 영화죠. NEW(Next Entetainment World)에서 배급된 이 영화는 추석을 맞이하여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끈 안시성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배우 조인성의 스크린 복귀작이기도 하죠.

 

 

 

 

 

 

안시성 (安市城, THE GREAT BATTLE, 2017)

 

 

우리는 물러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무릎 꿇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항복이라는 걸 배우지 못했다!

 

 

 

천하를 손에 넣으려는 당 태종은 수십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의 변방 안시성을 공격합니다. 20만 당나라 최강 대군 vs 5천명의 안시성 군사들. 40배의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전사들은 당나라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는데....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끈 안시성 전투가 시작된다!

 

 

전쟁 영화의 묘미는 역시 웅장한 전투 씬이라 할 수 있어요. 명량 이후 간만에 외적과 싸운 한국 전쟁 영화가 반갑지 않을 수 없었죠. 특히 배우 조인성의 스크린 복귀작이라는 점도 눈에 띠었는데요. 2016년 더 킹 이후 스크린으로 돌오안 조인성. 역할 만큼이나 눈에 띠는 연기력에 다시 한 번 박수를 쳐보며 예매율 1위를 달성한 '안시성'을 돌아봐요.

 

 

 

 

돌아보는 역사적 배경

 

 

영화의 배경이 시대는 645년. 연개소문의 정변과 신라의 구원요청을 구실로 삼아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나서면서 벌어진 안시성 전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보면 642년 가을,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 남쪽에서 대대적인 군대 사열식을 대최했는데 술과 음식이 성대히 차려지고 많은 귀족이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화려한 시깅 거행되던 중 연개소문의 신호를 받은 부하들이 순식간에 100여 명의 귀족을 처단하고 그 길로 궁으로 달려가 고구려 27대 왕인 영류왕을 시해하여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 시궁창에 던져버리고 영류왕의 조카를 새로운 왕으로 삼아 보장왕이라 하였으며, 연개소문은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는 막리지에 오릅니다.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뉘어 지는데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과 정계 갈등이 등장할 무렵 벌어진 사건이죠. 이 사건의 배경에는 당나라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었는데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태종 이세민이 팽창 정책을 쓰면서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죠.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로 일관하였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수나라 군사 1만 명을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조건 없이 송환했고, 왕세자를 당에 보내 조공을 하기도 했어요. 한창 성장하는 당나라와의 전쟁은 피하자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반면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을 지닌 연개소문을 비롯하여 30여년 전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자부심을 가진 고구려의 무장 세력들은 이런 영류왕의 정책에 반발했죠. 대당 강경파의 선봉이었던 연개소문 집안. 지략과 재주가 뛰어나면서 이십 대의 혈기왕성한 연개소문은 당시 집권층에게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고, 정치적 소수파였으나 동부 대인 겸 대대로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던 아버지로 부터 대대로의 직위를 계승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어요. 영류왕과 귀족들이 그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고, 이 정보를 먼저 입수한 연개소문이 선수를 치며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답니다.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한 후 백제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진 신라 김춘추 장군은 도움을 요청하지만, 보장왕은 고구려의 옛 땅인 한강 유역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겠다라고 하죠. 신라로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연개소문 역시 이 제안을 신라가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즉, 신라 대신 백제를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요. 연개소문은 이후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면서 고립된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고구려를 침략한 당 태종 이세민

 

 

한반도 정세를 살펴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국을 이루었던 시대죠. 백제는 31대 의자왕, 고구려에는 보장왕이 있었으나, 연개소문이 권력을 쥐고 있었고, 신라에는 김춘추와 김유신이라는 걸출한 장수가 있었죠.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 27대 왕이자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 632년부터 647년까지 직위를 하였으며, 647년부터 654년까지 신라의 제 28대 왕을 지닌 진덕여왕은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으로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강화했는데요. 이 배경에는 당나라의 황제 당태종이 중원을 장악하고 나서 돌궐을 복속 시켰고, 서역의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있을 때였습니다. 또한 천하 통일의 야망을 하나씩 실현해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645년 고구려 침공은 천하 통일을 위해 넘어야 할 가장 위협한 국가가 바로 고구려였던 셈인데요.

 

 

천하통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구려와 전쟁을 불사질러야 했던 당 태종은 644년 고구려 정벌을 위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연개소문이 임금으르 죽이고 대신들을 살육했으며, 그 백성을 참혹하게 대하더니 지금 또 나의 명령을 위반하고 이웃 나라들을 강제로 침략하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명분을 앞세운 침략의 시작이었죠. 하지만 중국 역사서를 살펴 보면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집권하기 전부터 몇 차례나 고구려 정벌의 뜻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중국 중심의 천하를 꿈 꾸는 당 태종 이세민에게 고구려는 제압해야 할 상대였고, 여기에 반발하는 연개소문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대결이었던 셈이죠.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002&cid=43073&categoryId=43073)

 

 

고구려 정벌을 위한 당나라 거센 공격

 

 

안시성 전투에 대한 자료를 살펴 보던 중 흥미로운 점을 보게 되었는데 당 태종은 고구려 침공 전 당대 전략가였던 위국공 이정과 군사 지식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병법에 관해 문답한 명문명답의 내용을 담은 중국병서의 고전인 무경칠서() 가운데 한 권인 <이위공문대()>라는 책을 보면 당 태종은 신라의 요청을 받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전에 병학에 정통한 이정과 함께 해박한 군사 지식을 서로 나누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죠. 이 책에 의하면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을 고심하며 이정에게 묻자 이정은 "신이 알고 있는 바로는 고구려의 정권을 쥐고 있는 연개소문이 병법에 통달했다고 자부하고 있으며, 중국이 멀리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여 폐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3만 명의 병력만 주시면 연개소문을 사로 잡아 바치겠습니다" 그러자 당 태종이 말하기를 "3만의 적은 병력으로 머나먼 고구려를 무슨 전법으로 정벌할 계획인가?" 하자 "신은 정공법()을 쓰겠습니다."

 

 

사실 영화에서는 20만 대군이라는 시나리오로 접근하였으나 자료에 의하면 수나라 양제가 범한 과오를 분석하고 대병력보다는 소수의 정예부대로 평양성 점령을 목표로 했다고 합니다. 육군은 요동반도를 통과하고 수군은 바다를 건더 수륙 양면 작전 전개를 계획했죠. 대병력보다는 소수의 정예부대 위주로 육군 6만 수군, 4만 등 총 10만 명의 원정군을 편성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나 당 태종은 후방의 안정을 고려하여 원정군 규모를 축소하고 용병술과 정예부대의 능력, 특별히 준비한 공성장비 등에 자신을 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의 시작, 고구려vs당나라

 

 

4월 1일 당나라 육군은 요하 강을 건너 현도성, 신성, 건안성, 개모성을 함락 시킵니다. 수군도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하죠. 또한 요동성을 포차와 충차로 밤낮을 쉬지 않고 12일간 공격, 수만 명이 성을 기어오르기를 반복한 끝에 함락시켰고, 백암성까지 빠르게 점령하며 기세를 올립니다. 이에 고구려 군은 반격을 통해 신성과 건안성 등을 지켜 내면서 당나라로써는 평양성을 치기 위해 가장 빠른 길인 안시성을 향합니다. 

 

 

 

 

고구려 당나라 전쟁 최후 결전지 안시성

 

 

 

영화 '안시성'에서는 연개소문이 태학도를 포함하여 15만의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를 상대하는 평야 전투 씬이 등장하는데요. 역사적으로는 고구려가 당 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고연수, 고혜진 장수에게 15만의 원군을 주었으나 대패하는 것으로 나오죠. 영화 역시 역사에 바탕을 두어 대패하고, 태학도 수장인 사물(남주혁)이 연개소문(유오성)을 대면합니다.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 암살을 지시하며 사물에게 단검을 주고 안시성으로 보내는데요.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

 

 

박지원의 <열하일기>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야사에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모와 용기가 뛰어났다고 하며,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성주의 지위를 유지했다고 하죠. 이에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안시성 전투를 지휘한 장수가 양만춘 장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시성으로 향한 태학도 수장 사물(남주혁)

 

 

안시성으로 향하던 사물은 고구려 말을 하는 두 명의 군사를 만나게 되고, 안시성으로 동행하죠. 그리고 웅덩이에 수레 바퀴가 빠져 허우덕 거리는 주민을 도와주는 양만춘(조인성)을 만납니다. 안시성 부관 추수지(배성우)는 당나라가 보낸 첩자임을 눈치채고 사물과 동행하는 두 명의 군사를 처치하고, 사물을 포박하죠. 안시성으로 들어온 양만춘과 일행은 사물을 추궁하자 연개소문이 보낸 첩자라는 것을 눈치채죠. 하지만, 사물을 죽이지 않고, 전투에서 대장 기를 들게 합니다.

 

 

 

전투의 시작

 

 

이위공문대의 첫 머리에 나오는 기록으로 비롯하여 영화 '안시성'에서는 첫 전투는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성장비를 활용합니다. 거대한 돌을 공성장비에 장착하여 성벽에 타격을 가하지만 흙을 이용하여 쌓은 성 벽은 무너지지 않죠. 그러자 성벽을 타고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활용하는데요. 거센 반격을 행하면서 성 벽 오르기에 실패 합니다. 이어 성 보다 높은 나무 탑을 활용하지만 기름과 불 화살을 이용하여 이를 저지합니다.

 

 

 

성 벽 보다 높은 산 토산의 등장

 

 

이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토산이 등장하는데요. 안시성을 넘지 못한 당 태종 이세민은 60일에 걸쳐 안시성 남동쪽에 성벽보다 훨씬 높은 토산을 쌓게 됩니다. 이에 안시성은 토산 보다 높은 성벽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고 하는데요. 당 군은 부복애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에게 토산의 정상에 올라 수비하게 했으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에서 고구려 군이 쏟아져 나와 토산을 탈취하여 당 군은 토산의 탈환전을 3일 동안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가면서 당 군은 철수하기에 이르고, 방어를 완수한 안시성은 동아시아 역사에 남을 전투를 완성하게 되죠. 속설에 의하면 9월 무렵 완성되어 전투를 감행하였으나 태풍으로 인해 무너졌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비와 바람이 부는 장면이 나오지만, 토산을 무너 뜨린 건 안시성의 백성인 토굴 꾼(우대 역의 성동일 외)이 땅을 파서 균형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 군의 퇴장, 그리고 송별의 예를 표하다

 

 

기록에 의하면 당 군은 토산의 탈환전을 3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싸움은 날마다 6~7회 의 가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고 하는데요. 안시성을 포위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요지부동하면서 고구려 군의 용맹성에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9월에 이르러 한랭이 돌기 시작하고 병마의 양식도 떨어져 당 태종은 할 수 없이 철군하기로 결정하죠. 당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안시성의 성주가 성 위에 올라 당 태종을 바라보고 송별의 예를 표했다고 하는데요. 당 태종은 적일지라도 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난 후 당 태종은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다시는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양만춘' 그 이름도 찬란한 '안시성'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는 말이 있듯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죠. 하지만 고구려 전사들은 안시성과 함께 671년 7월 함락되기 전까지 함께 합니다. 고구려 부흥 운동의 요동 지역 중심지였죠. 하지만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을 이뤄 삼국 통일을 이루면서 많은 부분이 소실되면서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상상에 의한 예측이나, 한반도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전투 중 하나인데요. 안시성의 위치는 언급하는 사서마다 위치가 다르게 적혀 있으며, 중국 정부의 통제로 한국 취재팀의 출입이 금지되어 지금까지도 확실히 밝혀져 있진 않다고 합니다. 이로 미뤄보아 과거 한반도 영토는 중국 대륙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 같네요.

 

 

 

 

 

 

조인성으로 본 안시성 성주 '양만춘'

 

 

기록에 의한 자료가 없어 양만춘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을 지 궁금증을 자아내는데요. 안시성에 등장하는 부관 추수지(배성우), 기마부대장 파소(엄태구), 백하부대장 백하 (설현), 환도수장 풍(박병은), 부월수장 활보 (오대환), 토굴꾼 우대 (성동일) 등이 전투에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치면서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20만 대군과의 방어 전투에서 승리한 점은 그가 외세 침략에 대비하여 흙으로 성벽을 쌓고, 적의 공격에 따라 방어 전술을 사용하는 지략가임을 짐작케 합니다. 또한 백성과 군사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성품을 지녔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요.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야사에는 기록되어 있는 이름 '양만춘', 야사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 하나로 실존에 대한 의문점을 단정 지을 수 없으나, 이 이름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일깨우고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영화 '안시성' 관람 포인트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안시성'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을 단행한 당 군과 이를 막기 위해 안시성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전쟁 영화인데요. 성벽을 오르는 당 군과 싸우는 전투 씬에서는 액션 감 넘치는 카메라 워킹과 짙은 영상미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